단종 이미지.
두견새우는 청령포
왕관을 벗어놓고 영월땅이 왠말이냐
두견새 벗을삼고 슬픈노래 부르며
한양천리 바라보며 원한으로 삼년세월
아~~~애닲은 어린임금 잠능에 잠들었네
두견새 구슬프게 지저귀는 청룡포냐
치솟은 귀암절벽 구비치는 물결은
말해다오 그 옛날에 단종대왕 귀양살이
아~~~오백년 오랜역사 비각만 남아있네.
장릉은 단종의 능입니다. 단종은 청령포에 유배되어 17세 되던 해 죽임을 당하고,
그 주검이 동강에 버려졌습니다. 영월호장이었던 엄흥도가 그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이곳에 암장했습니다. 장릉에는 엄흥도의 충절을 기린 정려각과 매년 단종제향을 지낼 때
제물을 준비하고 제기를 비롯한 각종 사용 기구를 보관하는 재실이 함께 조성돼 있습니다.
장릉으로 향하는 솔숲
단종의 묘소는 장릉 정문 맞은편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 솔숲길을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s'자형 오솔길이 제법 운치 있습니다. 소나무들이 일제히 장릉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서있는 모습을 보니
단종애사가 떠올라 애잔합니다. 묘소 앞에 서니 소슬바람이 붑니다.
바람결에 슬픈 옛이야기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장릉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단종릉을 찾았다.
엄흥도기 단종의 시선을 지게에 지고 이곳에 도착하였을때
언덕위 소나무 밑에 숨어있던 노루한마리가 놀라 달아났는데
그 자리를 보니 눈이녹아 있어 그곳에 지게를 내려놓고 쉬었는데 깊은
산골로 옮기려 했으나 지게가 움직이지 않자 노루가 있던
이곳에 시신을 암장했다고 한다.
역사상 슬프고도 애환이 많은 단종의 능은 처음부터 택지된 곳에
조성한 능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조선 왕릉의 구조와 다른 점이 많다고 하며
조선 왕릉은 한양 100리 안에 모시는 것이 관례였지만 단종의 능은
지방에 모셔진 유일한 능이라고 한다.
{사능에서 이전 식수한 소나무}
한여인의 한 서린 통곡이 백성들의 마음까지 울려 정순왕후는 1454년(단종2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가 다음해 단종이 상왕이 되자 의덕왕대비로 진봉되었다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자 대비역시 부인으로강봉되어 궁궐에서 쫓겨났다.
노산군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면서 단종과 생이별을 하게 되자
동대문밖 연미정동에 초가집을 짓고 정업원(지금 청령사)이라 이름을
짓고 단종을 그리워 하며살았다.
단종이 죽음을 당한 것을 알게 된 정순왕후는 매일 절뒤에 있는
동망봉 산봉우리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비통해 했다고 하며 소생없이
82세까지 살았다.( 인터넷 검사글 )
정순왕후는 소생이 없어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 시집인
해주 정씨집인 해주 정씨 집안에서 장례를 치루어 지금위치인
경기도 양주 군장리에 있는 해주정씨 묘역에 같이 있다.
정순왕후는 1698년( 숙종24년)추복되고 능로는 사릉으로 추봉되었다.
세조의 명으로 단종에게 사약을 전달하러 영월까지 온 왕방연은 괴롭고
허망한 심정을 시조로 남겼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청령포가 빤히 바라다보이는 강 언덕에 그의 시조비만 애닯게 서 있다.
장판옥엔 충신위 32인, 조사위 186인, 환관군노위 44인, 여인위 6인의
합동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며 가운데 누각은 수복방으로 능과 경내를 관리하는
능지기가 기거하던 곳으로 영조 9년에 정자각과 함께 세운 것이며 왼편 누각은
"비각"으로 주인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 등을 모시거나 세워두는 곳이라고 한다.
단종어가 마당에 세워져 있는 단묘재본부시유지
이비석이 단종이 청령포에 살았음을 증명해 주는 비석이다.
1763년(영조 39년)에 영조의 친필을
화강석 비좌 위에 올려진 오석으로 된 비신에 새겼다.
청룡포 서쪽 절벽인 육육봉과 노산대 사이에 있는 망향탑
어린 단종이 이곳으로 유배되어 한양땅에 두고온 왕비를
그리워하며 쌓았다는 돌탑이며,
그 얼마나 단종의 애절했던 심정을 헤아릴 수가 있다.